영성BOOK/도인(道人)

도인(道人) 1 - 7. 장엄한 화산

기른장 2025. 3. 4. 21:39

제 2부 화산에서의 어린 시절

7. 장엄한 화산

화산은 고립되어 있는 종교 공동체이자 교육 공동체였다. 또한 화산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전설이었다. 도사들은 화산에서 특수한 지식을 연구하며 보존해 왔고, 그 지식을 전수자들에게 교육시키면서 명상과 수련을 주로 하는 은둔자의 생활을 추구했다.

다섯 개의 주봉에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도관과 별채가 있었는데, 곳곳마다 도사들과 제자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 모두가 대사부의 지도 아래 있기는 했으나, 각각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도교의 여러 분파들은 상당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분파는 경전 연구와 주술, 무술을 강조했지만, 사이훙이 들어간 분파는 양생법과 내공법, 고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분파를 막론하고 도교의 도사들에게는 공통되는 기본 원칙이 있었으며, 서로간에 많은 토론과 교류가 있었다.

이 같은 다양함이 화산을 풍요롭고 이상적인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교육을 받는다는 일이 특권이었던 그 시대에, 화산의 도교 사찰들은 대학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아홉 살난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아이들 중의 일부는 도사의 길을 걸었으나, 대다수는 화산 교구 내의 전통적인 교육 장소로 보내졌다. 사찰 안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소년들은 전문 분야를 맡고 있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전과목을 학습했다.

 
도사가 되기 위하여 화산에 들어오는 학생 수는 대단히 적었다. 도교의 어떤 분야를 추구하든 간에 수도자는 스승을 정신적 아버지로 모시며 공부해야만 했다. 스승은 자신이 직접 가르침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자기 제자를 다른 스승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기도 했다. 화산의 스승들은 거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일단 제자로 삼으면 도교의 모든 전통을 그 제자들을 통해 전수했다.

가르침과는 별개로, 화산에서 가장 걸출한 수련자들은 그들 스스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도교는 무한정한 것이며, 더욱더 높은 지식을 일생토록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도사들은 약초나 의약을 연구하기도 했고, 어떤 도사들은 시와 서예, 음악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도 했다. 또 불사를 추구하여 내공법에 몰두하는 도사들도 있었다.

반면 은둔해 살거나 세속에서 은퇴하여 만년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출가한 사람들 중에는 이미 불사의 신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화산의 도관들은 모두 출가와 고행이라는 철학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화산파는 일심도(一心道)와 자아 완성의 철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이훙을 도교의 풍부한 전통에 입문시켜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완전한 영적 인간으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사부는 현명했다. 사이훙이 도교를 공부하는 것이 어려우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이훙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지금 그 훈련을 시작해야만 했다. 어린이에게는 자유롭게 커나갈 수 있는 자유와 동시에, 바르게 이끌어주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크게 자랄 나무는 떡잎부터 잘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대사부는 시자들에게 사이훙을 천천히 이끌어 가도록 명했다.

대사부는 사이훙이 화산의 생활을 차츰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화산은 너무나도 깨끗한 곳이었고 깨달음을 성취한 도사들의 광채로 짙게 물든 곳이었으므로, 틀림없이 사이훙에게 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이훙이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이훙은 도교의 전통을 아주 자연스럽게 흡수할 아이였다.

사이훙이 화산에 도착한 지 꼭 하루가 되자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사이훙을 화산의 정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사이훙에게 도교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북봉의 산등성이에 나 있는 길은 자미대제의 길로, 다른 네 개의 봉우리들로 갈 수 있는 통로였다. 자미대제의 길은 아주 좁았으며, 거의 수직으로 뻗은 절벽 속에 선반처럼 나와 있었다. 어떤 곳은 암벽 때문에 거의 통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절벽은 안개에 가려 있었으며 절벽 아래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사이훙은 칭 수이셩의 손을 꼭 잡고 따라갔다.
 
뒤틀린 듯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는 중간 높이의 봉우리까지 급히 떨어져 내려가는 절벽이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사이로 작은 도교 사찰들이 있었다. 소나무 숲을 지나 그들은 창룡령(蒼龍嶺)으로 올라가는 중봉의 아래쪽에서 다시 급경사를 만났다.

깎아지른 듯한 그 절벽에는 돌을 깎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 있었다. 도사들의 풍수지리학에 따라 설계된 계단은 상당히 가파르고 올라가기 어려웠다. 화산의 외곽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길들은 화산의 경치를 망치지 않고 오히려 등산객과 화산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주었다. 창룡령은 곧바로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등산객과 화산과의 신비로운 조화를 보여 주는 길이기 이전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계단은 풍화되어 형태를 할수 없게 되었고, 난간도 없었다.

북봉으로부터 창룡령을 지나 금쇄관(金鎖關)으로 이르는 고개는 두 시간이 걸리는 등반길이었다. 그 동안 그들은 여러 도사들과 제자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며, 어떤 사람들은 명상하며 산책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도관으로 식량을 운반해 가느라고 몹시 바빴다. 금쇄관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중봉, 동봉, 남봉, 서봉, 그리고 금쇄관으로 돌아가는 길 등 다섯 방향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소나무 숲과 큰 도교 사찰이 있는 중봉에서 나와 동봉으로 갔다. 동봉은 조원동(朝元洞)이라고 불렸는데, 정상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봉에 있는 도교 사찰은 하얀 회벽에 기와지붕이 얹혀져 있었고 사각형의 건물들이 큰 사변형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 나무에 진흙을 발라 지은 작은 오두막들이 있었다. 쇠로 만든 큰 종을 걸어 놓은 종각과 이슬을 받아 모으는 돌컵 뒤를 지나 오두막에 이르렀을 때, 사이훙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느다란 몸을 가진 어떤 남자가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회색빛 장삼을 입고 사각형의 옥을 앞에 매단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시자들은 그가 법술사라고 알려 주었다. 사찰들마다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강인하게 보였다. 그들 가운데는 시자들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자기들도 언젠가는 이 동봉에 와서 그들처럼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자들과 사이훙은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 박태(博台)라고 불리는 흙 위로 노출된 바위 봉우리에 이르렀다. 박태라는 곳은 너무나 높고 외진 곳이었으며 뒤쪽은 절벽이었다. 10세기경 송나라의 태조는 군사적, 전략적 가치 때문에 화산을 원했다. 그러나 도사들은 화산을 신성한 곳으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진둔」이라는 불사의 신선은 황제에게 바둑을 두자고 제의했다. 승자가 화산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그 외딴 박태의 꼭대기에서 바둑을 두었으나 황제는 연전연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 신선은 황제가 놓는 수를 모두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황제는 패배를 시인했다. 박태라는 이름은 그때 생긴 것이고, 이후로 화산은 그대로 도교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세 사람은 낭떠러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가장 위험한 곳인 장공기(長空機)라는 통로 앞에 이르렀다. 그 길은 가파른 절벽면에 강철심을 박아 거기에 나무판들을 깔아 놓은 길이었다. 거기에는 1천 미터가 넘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줄 난간도 없었다. 오직 쇠사슬들만이 벽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칭 수이셩은 사이훙을 그의 등뒤에 묶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갔다. 널빤지들이 흔들거리면서 삐거덕 소리를 냈다. 암벽을 향해 몰아쳐 오는 찬바람에 사이훙의 땀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두 눈을 꼬옥 감았다. 공중에 떠있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 사이훙은 온 힘을 다해 칭 수이셩만 붙잡고 있었다.

남봉은 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양 옆은 완전히 수직을 이루는 절벽이었기 때문에 나무도 자라지 못했고 눈조차 쌓이지 못했다. 이 왕관 같은 봉우리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중원이 멀리 보였고 황허와 뤄허, 웨이허가 지평선까지 늘씬하게 뻗어 있었다. 남봉에는 화강암으로 이뤄진 움푹 팬 분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솟아 나오는 샘물이 있었다. 시자들은 앞으로 사이훙이 살게 될 남봉의 도관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봉우리는 서봉이었다. 거친 돌길이 산등성이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봉우리의 줄기를 따라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이 솟은 도관이 있었다. 이것도 역시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었다. 도사들은 땅의 중심이 되는 용맥(龍脈)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체에 있는 경혈과 마찬가지로 길은 혈(穴)이라고 불리는 몇 개의 힘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혈의 위치가 북봉과 서봉처럼 산꼭대기가 될지라도 도사들은 그 힘점들 위에 도관과 사찰을 세웠다. 건물들은 언제나 벽돌과 돌, 나무등의 천연 건축자재들로만 만들어졌으며, 주위를 둘러싼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서봉에 있는 사찰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약 60도 가량 되는 경사면 위에 세워진 서봉의 사찰은 암석들과 나무들에 가려져 있었다.
 
서봉은 기묘하게 외떨어져 있었다. 어떤 낭만적인 사람들은 전설에 따라 서봉을 연등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전설은 옥황 상제의 일곱 따님 중의 하나와 어떤 잘생긴 목동 사이에 있었던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 세계의 목동과 사랑에 빠진 옥황 상제의 따님은 아버지 몰래 목동과 함께 살았다. 목동과 함께 살던 그녀는 아이까지 낳았는데, 이 사실을 안 상제는 그녀를 서봉속에 감금했다. 후에 그녀의 아들은 자라서 도교의 도사를 찾아가 법술을 가르쳐 주기를 청한다. 때가 무르익자 도사는 그에게 하늘의 도끼를 준다. 그는 그 도끼를 가지고 하늘의 군대를 무찌른 뒤 서봉을 가른다. 그러나 그 하늘의 장수가 천군을 이끌고 다시 돌아와 모자상봉은 무산되고 만다. 아들은 하늘의 도끼를 들고 싸웠고, 그의 모친은 아들과 함께 천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연등을 무기로 해서 술법을 썼다. 옥황 상제는 그들의 정성에 감동해서 마침내 모자를 용서해 주었다. 그때부터 서봉은 도끼로 내리쳐 생긴 틈과 함께 연등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산의 경치와 전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이훙에게는 화산이 수직으로 솟은 절벽으로만 보였다. 화산은 구름들로 가려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전설과 신화, 비범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도사들, 그리고 선반같이 비좁은 틈에 위치한 작은 도관들, 화산은 신비로운 곳이었고 성스러운 곳이었다. 비록 강제로 화산에 살게 되었지만 사이훙은 그 아름다움에 외경심마저 느꼈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으며, 화산에 압도적으로 가득 차 있는 위엄에 감동을 받았다.
 
시자들은 사이훙을 남봉의 앙천지(仰天池)라는 연못 아래에 있는 대사부의 거처로 안내했다. 대사부의 거처인 금천궁은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회를 바른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여러 개의 건물과 정원을 갖춘 금천궁은 전통 건축술로 지어진 것이면서도 평면적으로 보면 약간 비대칭을 이루었다. 시자들은 방과 건물들이 별자리의 모양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금천궁의 주실은 대사부의 거처였다. 앞에는 청동으로 만든 큰 향로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화산의 상징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대문으로 이어졌다. 머리에 등을 단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의 학이 돌계단 아래 세워져 있었으며, 건물의 기둥과 대문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는 조각이 되어 있었고, 붓글씨로 씌어진 현판이 문간에 걸려 있었다. 두 개의 현판에는 「모든 세속의 생각들을 잊으라.」 그리고 「오로지 채식하는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다.」라고 씌어 있었다.

 
화산에 있는 다른 도관들과 마찬가지로 금천궁 역시 평범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돌은 세월에 닳아 있었고, 나무는 바람과 비에 삭아 있었다. 주실은 물질적으로는 빈곤해 보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만한 느낌을 주었다. 좋은 향내가 복도 전체에 흘러 넘쳤고, 누군가가 경문을 외우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으며, 창문들은 먼산들을 볼 수 있게 높이 만들어져 있었다.

도관은 도사들이 관리했다.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건물을 고치는 일까지, 몸으로 해야 하는 모든 일은 도사들이 각각 분담해서 하고 있었다. 대사부를 빼고는 모든 도사들이 함께 노동하며 도관을 관리했다. 크고 작은 모든 노동이 도사들의 화합을 강화시켜 주는 촉매제였다.

수개월 동안 두 시자는 사이훙이 도관의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잤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도관의 하루는 기상하자마자 시작되는 종교적인 의무와 도관을 보수하는 의무로 채워졌다. 사이훙이 매일 아침마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창문을 열고 1년 내내 냉기가 감도는 음습한 방에 햇빛을 비추어 습기를 말리는 것이었다.

세수한 뒤에는 푸른 새벽빛을 헤치며 주실로 갔다. 아침을 먹기 전에 도관의 모든 수도사들은 그곳에 모여 기도하며 경서를 외웠다. 음식은 야채와 나물로만 만들어졌고, 지극히 간소했다. 한 사발의 쌀죽과 식초에 절인 채소 한 접시, 차 한잔이 전부였다.

사이훙의 아침 일과는 도교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는 일로 시작됐다. 사이훙은 시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았지만 때로는 다른 도관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읽기, 쓰기 등의 과목뿐만 아니라 맨손체조와 곡예까지 배웠다.
 
점심을 먹기 전에 또 한 번 경전을 암송하는 시간이 있었다. 경전을 암송하는 일은 도교에 귀의 하는 마음과 호흡력을 키우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암송하는 것 자체가 기(氣)를 기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사이훙을 제외한 모든 수도사들은 열심히 암송에 임했다. 사이훙은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그는 암송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웃고 두리번거리며 뭐라고 흥겹게 종알대곤 했다. 사이훙은 다른 수도사들처럼 그렇게 경문을 암송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로는 주로 국수와 야채가 나왔는데, 때로는 빵을 먹기도 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모두가 침묵을 지켜야 했으며, 옆사람이나 앞사람을 쳐다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이 대사부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그 동안 사이훙은 치우고 닦는 일을 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사이훙은 책임감과 인내심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책임감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훙은 재미도 없고 진지하고 덤덤한 수도생활이 무료하기만 했다. 천성적으로 놀기를 좋아하는 사이훙은 그에게 주어진 허드렛일들을 흥겹게 해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종종 불미스러운 결과들을 만들어 냈다.
 
사이훙은 창호지를 바른 섬세한 격자무늬 창문들을 발로 걷어차서 열어제쳤다. 겅둥대면서 총채를 휘둘렀고, 꽃에 물을 줄때는 위에서 아래로 양동이째 퍼부었다. 경전을 외우다가 경문 구절이 생각나지 않을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병풍처럼 접어 만든 경전들에 바람을 쐴 때는 책의 한쪽 끝을 잡고 아무렇게나 펼쳐서 마당까지 책장이 널려 있곤 했다.

사이훙이 맡은 일들을 제멋대로 해버리면, 언제나 반드시 응분의 징벌이 따랐다. 때때로 저녁을 굶어야 하기도 했고 또 경전들을 함부로 다루었을 때는 칭 수이셩이 그를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칭 수이셩은 사이훙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못에 대해서는 엄하게 징벌했다.

사이훙이 도관 생활에 익숙해지자 더 어려운 임무들이 주어졌다. 온실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일, 손님들과 몸이 아픈 수도사들이 먹을 병아리와 물고기를 키우는 일, 그리고 땔감을 모으는 일들이 주어졌다. 그는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른 도사들에게 가르침을 청해야 했다. 스스로 배움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대사부의 교육 방법이었다.

늦은 오후에는 시자들을 따라 산을 산책했다. 화산을 돌며 그들은 사이훙에게 화산과 자연에 관해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묵묵히 산책만을 하기도 했다.

사이훙은 저녁 암송이 끝나면, 야채와 국수, 그리고 찐빵으로 식사를 하고 또 학습을 했다. 그 뒤에 체조를 연습하고, 허드렛일들을 했다. 취침시간은 10시였다.
 
이러한 일과는 어느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계속 되었고, 사이훙은 어느덧 도관의 수도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수도생활의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어 보기 위해 농담을 하고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수도 생활을 즐겼다. 도관의 많은 수도사들은 사이훙의 어린아이다운 밝은 모습에 기쁨을 느꼈으며, 사이훙의 명랑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좋아했다. 도교는 또 하나의 제자를 키워 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제자는 비밀스러운 도관에 밝은 웃음을 가져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