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주 79

48. 기수련의 과정 1

서울에 올라온 첫날, 자정 무렵부터 청담동 선생님의 집에서 기수련을 하다 잠이 들었던 내게 다음 날도 선생님은 기수련을 하게 했다. 역학을 공부했으면 한다는 나의 바람을 완곡하게 전달했지만 선생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대구의 일은 모두 정리하고 짐까지 싸서 온 터라 나는 선생님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의 수련에 임했을 때 나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전날과 좀 달랐다. 방법은 같았지만 조금 더 강한 진동이 일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부터 손이 몸을 치기 시작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배꼽 윗부분으로만 기감을 느꼈지 하반신은 별로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 진동이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했다. 전신을 훑는 기감에 나는 데굴데굴 구르거나 기(氣)가 모인 손으로..

47. 나의 스승님

내가 처음 성문수 선생님을 뵈었을 때 그분은 40대 중반이었다. 키가 작고 아주 마른 체격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소 왜소한 용모였다. 그렇지만 정은 철철 넘쳐 흐를 정도여서 오빠의 소개로 내가 처음 청당동의 집을 찾았을 때는 마치 옛날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반겨주었다. 그렇게 정이 많은 선생님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눈가가 선선해지곤 했는데 나를 수련시키는 짬짬이 선생님의 지난날을 들려주곤 했다. 선생님은 경기도의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선친께서도 상당한 도력을 지닌 분이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남다른 도력을 목격하고, 경우에 따라선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동네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벙어리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한다. 말은 한 마디로 하질 ..

46. 스승과의 만남

그렇게 내가 곽도사에게서 사사를 받으면서 공부에 심취할 무렵에 서울에 있던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항상 어린아이 같기만 한 여동생이 대구에서 혼자 레스토랑을 하고 있는 게 마음이 쓰였던 오빠가 동생이 주역 공부를 한다고 얘길 듣고는 더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 있단다. 우리와는 성씨도 같아서 굳이 따지자면 아저씨뻘이 되는 사람이야. 네가 정말 그쪽으로 공부를 하려거든 그 사람 밑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 오빠의 간곡한 권유도 있고 해서 나는 일단 한 번 만나 보자는 심정으로 서울에 올라가서 그분을 만났다. 그분이 바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스승이신 성문수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분을 만났을 때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 보..

45. 곽 도사라 불리던 사람

친구와 ‘사랑스’라는 레스토랑을 같이 운영하기 위해 대구에 올라온 나는 레스토랑 근처에 방을 얻었는데 아주 아담하고 깨끗한 여인숙이었다. 기와집에 적당한 마당이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의 방이 독립되어 있는 그 곳은 주로 장기 투숙자들이 묵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철학관을 하고 있는 곽 도사라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나는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점이나 사주, 관상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또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피곤하던 때라 그런 쪽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나는 멋지게 사기를 치는 사람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기꾼들은 악랄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어쨌든 소양을 갖춘 사기꾼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늘 빈정대..

44. [5부] 또 다른 삶의 시작과 도(道)의 길

평생 도(道)의 길을 걷겠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실낱 같은 목숨마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얼마나 외롭고 힘든 길이며 쓸쓸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인연의 끈을 따라 이 길로 들어서 지금까지 왔지만 나는 아직 이 세계의 끝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내 몸에 깃든 영혼이 비로소 윤회의 바퀴를 굴리는 것을 멈출 때까지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영혼들과 함께 말이다. 또 다른 삶의 시작과 도(道)의 길 5부

43. ‘사랑스’에서의 일년

내가 대구에서 생활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이혼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진주를 떠나 마산의 언니 집으로 들어간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두려움과 뾰족한 방법이 없는 현실적인 조건으로 인해 나는 내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었다. 아주 어려서는 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그 후로는 외할아버지의 보호 아래에서 자라온 나였다. 나이 들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알기 전에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는 남편의 그늘에서 유리동물원에 갇힌 로라처럼 길들여진 대로 살기만 하면 그만인 상태였으니 나의 고민과 근심은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대구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때 그 친구는 ‘사랑스..

42. 내 삶의 의미가 되었던 아이들

나는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이혼을 했다. 당시 시댁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위자료를 받으면 아이들을 시댁에 두고 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정색을 하며 말렸다. “지금 마음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데리고 어떻게 살겠다는 거야?” “지금 제 정신이니? 그 사람이야 또 새장가 가면 되겠지만 넌 어떡 할래? 좋은 사람이라도 생기면 너도 다시 살아 봐야지. 뭣하러 아이들을 위해서 창창한 네 인생을 희생하는 거냐구?” 그들에게는 마치 내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각오하는 사람처럼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당시의 나는 두 아이를 제외한 내 인생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좀..

41. 결혼과 이혼(2)

시부모님은 아주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었다. 시아버님은 판사 출신의 변호사였는데 평생을 청렴하게 사셨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 월급으로는 아홉 남매를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는 얘길 자주 들려주곤 했다. 아이들을 제대로 입힐 수가 없어 군용담요를 사다가 옷을 만들어 입히곤 했다는 얘기며, 소송이 걸린 당사자로부터는 생선 한 마리 받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너무 가난해 공직생활을 포기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셨던 분이다. 게다가 당시로는 드물게도 시어머니께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언제나 시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자식들에게도 어머니를 존경하도록 가르쳤다. 시어머니는 그런 시아버지와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웬만한 일이라도 시아버님과 관계되는 일만 아니라면 남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 ..

40. 결혼과 이혼(1)

나의 남편은 내가 중학생일 때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배우던 가정교사 선생님의 친구였다. 당시에 그들은 대학생이었고 우린 중3 학생이었으니 그냥 어른으로만 보였었다. 아무런 이성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사이였고 그저 재롱부리는 아이와 어른과의 만남 정도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답지 않게 소탈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구간에 우정도 두터웠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타입의 남자였다. 그는 친구가 바쁜 일이 있을 때면 대신 우리의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너무너무 편했다. 먼 곳에 나가 있던 오빠 같았고, 아주 가끔은 희미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같았다. 그냥 그렇게 편하다 보니..

39. 외로움의 그림자 가슴에 품고

하루 아침에 너무나 어이없게 고아가 되어 버린 우리 6남매는 할 수 없이 외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직 젖먹이 티를 벗지 못했던 막내동생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분이 입양했으므로 정확히는 5남매인 셈이다. 어머니는 세 번째로 음독을 할 때 아무래도 젖먹이 막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막상 아버지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을 다잡고 보니 막내가 얼마나 마음에 걸렸겠는가. 그래서 막내도 데려 가려고 했던 모양이나 다행히 막내동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얼마 있지 않아 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던 아버지의 친구분이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이다. “내 딸 없는 외손들 다 싫다.” 외할머니는 끅끅, 트럼을 하시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하기야 줄줄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을 모두 돌보기란 결코 만만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