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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랑스’에서의 일년

내가 대구에서 생활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이혼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진주를 떠나 마산의 언니 집으로 들어간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두려움과 뾰족한 방법이 없는 현실적인 조건으로 인해 나는 내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었다. 아주 어려서는 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그 후로는 외할아버지의 보호 아래에서 자라온 나였다. 나이 들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알기 전에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는 남편의 그늘에서 유리동물원에 갇힌 로라처럼 길들여진 대로 살기만 하면 그만인 상태였으니 나의 고민과 근심은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대구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때 그 친구는 ‘사랑스..

42. 내 삶의 의미가 되었던 아이들

나는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이혼을 했다. 당시 시댁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위자료를 받으면 아이들을 시댁에 두고 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정색을 하며 말렸다. “지금 마음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데리고 어떻게 살겠다는 거야?” “지금 제 정신이니? 그 사람이야 또 새장가 가면 되겠지만 넌 어떡 할래? 좋은 사람이라도 생기면 너도 다시 살아 봐야지. 뭣하러 아이들을 위해서 창창한 네 인생을 희생하는 거냐구?” 그들에게는 마치 내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각오하는 사람처럼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당시의 나는 두 아이를 제외한 내 인생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좀..

41. 결혼과 이혼(2)

시부모님은 아주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었다. 시아버님은 판사 출신의 변호사였는데 평생을 청렴하게 사셨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 월급으로는 아홉 남매를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는 얘길 자주 들려주곤 했다. 아이들을 제대로 입힐 수가 없어 군용담요를 사다가 옷을 만들어 입히곤 했다는 얘기며, 소송이 걸린 당사자로부터는 생선 한 마리 받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너무 가난해 공직생활을 포기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셨던 분이다. 게다가 당시로는 드물게도 시어머니께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언제나 시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자식들에게도 어머니를 존경하도록 가르쳤다. 시어머니는 그런 시아버지와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웬만한 일이라도 시아버님과 관계되는 일만 아니라면 남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 ..

40. 결혼과 이혼(1)

나의 남편은 내가 중학생일 때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배우던 가정교사 선생님의 친구였다. 당시에 그들은 대학생이었고 우린 중3 학생이었으니 그냥 어른으로만 보였었다. 아무런 이성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사이였고 그저 재롱부리는 아이와 어른과의 만남 정도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답지 않게 소탈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구간에 우정도 두터웠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타입의 남자였다. 그는 친구가 바쁜 일이 있을 때면 대신 우리의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너무너무 편했다. 먼 곳에 나가 있던 오빠 같았고, 아주 가끔은 희미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같았다. 그냥 그렇게 편하다 보니..

39. 외로움의 그림자 가슴에 품고

하루 아침에 너무나 어이없게 고아가 되어 버린 우리 6남매는 할 수 없이 외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직 젖먹이 티를 벗지 못했던 막내동생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분이 입양했으므로 정확히는 5남매인 셈이다. 어머니는 세 번째로 음독을 할 때 아무래도 젖먹이 막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막상 아버지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을 다잡고 보니 막내가 얼마나 마음에 걸렸겠는가. 그래서 막내도 데려 가려고 했던 모양이나 다행히 막내동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얼마 있지 않아 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던 아버지의 친구분이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이다. “내 딸 없는 외손들 다 싫다.” 외할머니는 끅끅, 트럼을 하시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하기야 줄줄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을 모두 돌보기란 결코 만만한 일..

38. 사랑한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내가 다섯 살 무렵의 가을, 큰어머니의 장지에 다녀오신 아버지는 갑자기 자리에 누워 버렸다. 온몸이 펄펄 끓은 지 며칠. 몸을 데우던 열이 조금 가라앉자 아버지는 병원으로 가서는 그 길로 입원을 했다. 사람들은 초상집을 잘못 갔다드니 액이 붙었다느니 말이 많았는데 한 달 후에야 아버지는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겨울 방학 한 달을 꼬박 병원에 있는 동안 집 안 곳곳에는 냉기가 서렸다.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느라 병원에서 살다시피하는 어머니 대신 오빠는 아궁이가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장작을 피워 댔지만 한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정작 제 몸과 마음을 덮히는 것은 아궁이 밖으로 불꽃이 넘실대도록 불을 지피는 게 아니라 마음에 의지할 무엇을 하나 ..

37. 어린 시절의 티끌 만한 기억들

나는 6남매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하나와 언니 둘, 밑으로 여동생 둘인 셋째딸. 아버지는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였고 어머니는 엄한 가정교육을 받은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과 바로 이웃한 학교의 교감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정갈한 옷매무새만큼이나 집 안팎을 꼼꼼하게 챙기시던 분이었다. 뒷날의 내 삶이 워낙 모질고 팍팍해서인지는 몰라도 나의 유년기는 아주 화사한 봄볕같이 온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 풍족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음에도 우리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친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슴이 아주 따뜻한 분이셨던 걸로 기억된다. 자식들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낯선 사람에게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는 보기 ..

36. [4부] 내 삶의 빛깔들을 그리며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마다 나는 아련한 감회에 젖는다. 여섯 살에 부모님을 졸지에 여읜 이래 살아온 40여 년의 세월이 모두어 쥐면 꼭 한 주먹에 불과하지만 눈물과 땀과 한숨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지러울 지경이다. 막상 내 지나온 삶을 적으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지, 혹시나 나의 삶과 적지 않은 연관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앞선다. 또 돌이켜본 내 삶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가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쓰기로 했다. 기도(氣導)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단 공인일 수밖에 없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지난날도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

계(戒)

계(戒) 내가 이 시대에 맞도록, 이 시대를 보고 계(戒)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에서 한을 맺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남에게 원한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원한을 사지 않는 가장 큰 길로써 여러분이 꼭 지켜야 할 계(戒)가 있습니다. ========== 지계(持戒) 1. 살생을 하지 말라. 1. 도둑질을 하지 말라. 1.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남을 속이지 말라) 1. 간음을 하지 말라. (남의 가정을 가진 사람과 간통을 하지 말라) 이것이 이 세상에서 원한을 사지 않는 길입니다. 이러한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다면 원한을 사게 됩니다. 남의 원한을 사게 되면 자기의 마음이 좋은 곳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원한이 항상 앞에 가려 있지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 ..

"인체를 백신공장으로 만들 수 있다" :: 김대호원장의 신간이 드디어 출간!! (김흥광튜브 3월 22일 )

youtu.be/R3d0WFUlih8 탈북 핵물리학자 김대호원장이 천체물리연구에서 얻은 신비의 기술을 인체에 사상하여 밝혀낸 100세 건강과 장수의 길인 생체정보프로그램을 전하는 신간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생체정보프로그램을 구현한 '라파357'의 경이로운 치료사례들과 라파의 치유 원리들을 쉽고, 생동하게 접할 수 있는 신간에 대하여 저자가 직접 전하는 소개방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