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한국형 원자로 개발(2) 09. 다시 찾아온 기회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전력그룹협력회의가 열릴 때마다 '계통설계를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가 맡는 게 과연 타당한가' 에 대한 이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가장 논란이 됐던 점은 원자로 계통(系統) 설계와 원자로 본체 설계를 분리, 따로따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10부 한국형 원자로 개발(1) 01. 우리 것을 만들자 내가 1984년 4월 이후 한국에너지연구소장(한국원자력연구소장) 으로 재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한국형 경수로 개발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는 내 일생 일대의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만약 그때 개발에 실패했다면 현재 한반도에너지기구(KEDO)가 주관이 돼 ..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9부 경수로 핵연료 개발(3) 21. 평가 요령 내가 이같은 평가 기준을 제시하자 평가위원들은 "어떻게 이 세 가지를 함께 평가할 수 있느냐" 며 "도저히 불가능하다" 고 난색을 표했다. 나는 이들에게 "입학시험처럼 하라" 며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 주었다. "먼저 세 분야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항목들을 만들어라. 각 항목별로 담..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9부 경수로 핵연료 개발(2) 11. 한전 부사장 당시 한전 부사장은 핵연료주식회사 초대 사장을 지낸 김선창 씨였다. 그는 1982년 11월 한전 부사장으로서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취임, 약 7개월간 재직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내가 핵연료주식회사 2대 사장에 취임한 것이었다. 나는 朴사장 방에서 나와 金부사장을 만나러 갔다. 그러..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9부 경수로 핵연료 개발(1) 01. 뜻밖의 기회 대덕공학센터장으로 부임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1983년 4월 초순 어느날 오후, 봄 햇살이 따사로워 온몸이 나른했다. 모처럼 창밖을 내다보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이정오(李正五.71)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韓박사, 나 장관이요. 대통령..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8부 아쉬운 연계핵연료주기(2) 05. 미국의 간섭 마침 그때 주한 미대사관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미 국무부 핵(核) 감시국장인 앨런 세섬 박사가 나를 만나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유성으로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1983년 12월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통상 미국측 관리가 우리 연구소에 올 때는 미대사관 차를 이..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8부 아쉬운 연계핵연료주기(1) 01. 연계핵연료주기 이야기는 다시 1983년 초로 되돌아 가서, 내가 대덕(大德) 공학센터장에 취임한지 거의 1년만에 중수로(重水爐) 핵연료와 탱크 파괴무기인 대전차 관통자(對戰車貫通子) 개발에 성공하자, 연구소 분위기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론 양산(量産) 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려야 했지..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3
제7부 중수로 핵연료 개발(2) 09. 어림없는 개발비 하지만 독자 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캐나다가 무려 10억달러나 들었다는 얘기가 정말 실감났다. 1982년 당시 환율로는 약 6천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개발비는 고작 19억1천만원, 그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먼저 캐나다에서 구입한 중..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1
제7부 중수로 핵연료 개발(1) 01. 품질까지 보증하라 중수로(重水爐)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이정오(李正五.71) 과기처 장관이 국책사업으로 지정한 상태였고, 연구비도 1981년 8억 6천만원, 1982년 10억 5천만원이 각각 배정됐다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한 1982년도 당시 연구소 예산은 불과 30억원 밖에 안되는데,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01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