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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8. 요나스탈(Jonasthal)의 지하 핵실험장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구동독의 요나스탈(Jonasthal)이라고 하는데에서 1970년경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은 소련의 장갑차가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내려 앉아 깊은 데로 빠져버린 사고다. 당시 소련과 동독의 군 당국에서는 요나스탈의 지하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하도시를 발견했다. 거대한 수레바퀴 모양의 그 지하도시에는 중심부로 연결되는 통로들이 여러 개가 있었다. 그리고 고압의 전선들이 여기저기에 가설되어 있었는데 무려 25년 동안이나 지하에 뭍혀 있어 아무도 관리한 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스위치를 켰을 때에 전기가 들어와 지하의 도시의 면모가 환하게 들어났다. 중심부에는 엄청나게 크고 호화찬란한 홀이 있는데 번스타인 잘(Bernstein Saal)이라고 천정에 표시되어 있었다. 히틀러를 ..

대한민국의 1세대 과학자

대한민국 발전 초석을 놓은 과학자 1세대 ​ 李承晩이 씨를 뿌리고 朴正熙가 꽃을 피우다 / 월간조선 2020-11월 ​ ⊙ 이승만, 한국 미군 장교부인회의 도움을 받아 인재들을 유학 보내다 ⊙ 박정희, 해외 과학자들 유치해 科學立國 초석을 다지다 ⊙ 이휘소 박사도 유치 대상이었으나… ⊙ 애국심만으로 일하던 해외 유치 과학자들의 희생 ​ 1947년 8월 14일, 우리나라에서 선발된 젊고 유능한 학생들 30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들은 미군 화물선 모턴호(MORTON)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그들의 여권은 미 군정청이 발행한 것이었다. 그들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틈틈이 하버드 공대, MIT 공대 등을..

한강의 기적 2023.07.03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7. 남극 211기지에서의 비행접시의 양산: Haunebu I, II, III

나치독일에서 전쟁 중에서도 심혈을 기우려서 하우네부 비행접시는 지속적으로 개발했다. 1944년에 유럽의 전세는 이미 불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모스코바 침공에서 참패하고 영국과의 전쟁은 공중전과 지상전 그리고 리비아의 기갑부대 등에서 계속하여 참패했다. 롬멜장군은 히틀러에게 전쟁을 중단하는 방향으로 충고했고 헤쓰(Hess)는 영국에 몰래 잠입하여 휴전협정을 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거기에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점점 현저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총애했던 슈타우펜베르그가 서류가방에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히틀러의 책상 밑에다 놓았는데 폭발하기 2분전에 갑자기 히틀러가 화장실에 갔기 때문에 사고현장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하우네부의 개발을 남극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항으로 내..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6. 남극의 독일영토 : 노이슈바벤란드(Neuschwabenland)

지금까지 나치독일의 특히 히틀러의 이념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건립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이에른의 일루미나티 그리고 ‘신 세계질서(Novus Ordo Seclorum NOS)’와 같은 비밀지하조직과 연관이 있음을 고찰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동안에 그렇게도 많은 과학의 발전을 이룩함과 초인간적인 신형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치는 분명 외계문명과 연관이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전혀 무근한 것은 아니다.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교황 요한23세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편은 사실은 패배자이며, 승리하지 못한 편은 승리자이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이 사실은 엄청난 과학과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5. 환상적인 에너지

미립자(微粒子)세계에서의 천재지변이라 할 굉대(宏大)한 섬광(閃光)이 달렘(Dahlem)의 실험실에서 발생하고 난 이후 여기에서 방출되는 핵에너지를 제일 먼저 계산해 낸 사람은 바다 건너의 스웨덴에서 편지로 이 소식에 접한 마이트너(Meitner)여사와 그의 조카 프리쉬(Frisch)박사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의 닐스 보어(Niels Bohr)로부터 핵에너지와 중성자 방출에 대한 중대한 이론에 접한 그는 아인슈타인(Einstein)이 발견해 낸 공식 E = m c² 에 의해 우선 우라니움 원자핵 (U235) 분렬 당시 211.5 메가 전자볼트(MeV)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이트너여사는 이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 스스로 여러번 계산해 보기도 했다. 결국은 프리쉬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마이..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4. 달렘(Dahlem)의 섬광(閃光)

1938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운 계절이었다 영하 16도의 기온에 오데르(Oder)와 도나우(Donau)강들은 꽁꽁 얼어붙어 수화물 선박의 육지에로의 진입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의 정상에는 영하 22도를 기록했다. 이러한 혹독한 추위는 “수정(水晶)의 밤”을 겪어야 했던 유대인들과 독일사람들의 마음의 세계를 한가지로 냉혹하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勃發)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랜드 침공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세계정복야욕이나 “세계의 독일화” 내지는 “범 게르만주의”등의 견지에서 본다면, 〈유대인의 세계화(Weltjudentum)〉에 대해 도전한 때로부터 세계대전은 일어났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1938년 11월 9일 나치독일이 감행한 “수정..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3. 수정(水晶)의 밤 (Reichskristallnacht)

1938년 1월 30일은 히틀러가 국가원수의 자리에 오른지 5년째 되는 해였다. 그는 독일국민에게는 사상 처음보는 평화수호와 국민생활 향상에 전심한 영도자로 생각되었다. 히틀러의 새로운 경제개혁과 문화정책은 6백만의 실직자들에게 일터를 마련했고, 국민문화수준을 향상 시켰으며, 1936년에는 올림픽경기를 통해 평화수호를 위한 독일국민의 단합과 각오를 세계만방에 드높였다. 리하르트·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올림픽찬가로 시작된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할렐루야” 합창으로 축전의 막을 내렸다. 1936년 베를린의 범세계적인 행사는 역대의 올림픽 중 드물게 보는 평화롭고도 경건한 분위기였다. ‘힘은 즐거운 삶으로부터 (Kraft Durch Freude)’라는 국민 사..

지만원 족적[5] 3. 5.18을 나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

3. 5.18을 나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 ①불길인 줄 알면서 뛰어들 사람, 또 있을까?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쓰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그래서 독보적 두각을 나타내는 역사가가 없다. A가 아는 역사는 B도 알고, B가 아는 역사는 A가 안다. 이런 역사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없다. 역사의 당사자들이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5.18 역사는 초 현대사, 즉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다. 역사의 당사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역사라 정치적 부담이 가해지는 위험한 역사다. 5.18 역사의 당사자들에는 정치적 강자가 있고, 정치적 약자가 있다. 정치적 약자에게 유리한 역사를 쓰는 사람은 정치적 강자들로부터 집단 보복을 당한다.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험난한 인생행로를 ..

지만원 족적[5] 2. 장경순과 나

2. 장경순과 나 앰배서더 호텔로 찾아온 장경순 광주로 끌려가기 8개월 전인 2002년 4월 5일, 나는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에서 라이온스클럽이 초청한 조찬 강의를 마치고 나왔다. 강의실 문을 나서자 정준이라는 사람이 다가왔다. 1층 커피숍에 장경순 의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니 잠시 시간을 내 달라고 했다. 나는 장경순 의장이라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정준 씨는 장경순 같은 거물을 모르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5.16혁명을 주도했고,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까지 하시고 현재는 헌정회 회장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헌정회는 또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옛날에 국회의원을 했던 예비역들이 구성한 모임인데 장경순 씨가 의장이고 자기는 그를 보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

지만원 족적[5] 1. 김대중과 나

1. 김대중과 나 벼락 출세한 예비역 대령 미 해군대학원 교수생활을 마감하고 나는 1989년 말에 귀국했다. 세계일보가 문 앞에 놓여 있기에, 율곡사업(전투기 증강사업)에 대한 칼럼을 하나 써서 회사로 보냈다. 그런데 세계일보의 기자 두 명과 논설위원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율곡 13년의 성과를 평가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국방부 건물에 사무실 하나를 차지하고 율곡 관련 사업문서 모두를 특명검열단으로부터 가져다 8개월에 걸쳐 분석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세계일보는 제 11면 전면을 나에게 할당해 매주 수요일마다 내 글을 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이라 일반 국민은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당시 군, 특히 공군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정치적 압력이 세계일보에 가해졌다. 나는 1..